오봉산 - 여근곡과 주사암
오봉산 - 여근곡과 주사암
2009년 11월 28일 토요일 흐림
경북 경주시 건천읍
유학사-여근곡-쉼터-오봉산-주사암-만교사입구-성암사-약사사입구-송선리
11:00 11:20 12:30 점심 15:00(4시간)
부산(富山)은 주사산,오로산이 라고도 하며,
다섯 봉우리가 마치 닭 벼슬같이 오똑하게 생겼다 하여
닭벼슬산,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여근곡
신라 선덕여왕 5년(636) 겨울 도성(都城) 외곽에 있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들이 며칠동안 울어 대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한 일이라 여겨 여왕에게 아뢰었더니
선덕여왕은 두 명의 각간(角干)에게 정예 군사 2천을 주어
서쪽 여근곡에 백제군이 숨어 있으니 격퇴하라하였다.
신라군이 여근곡에 도착하니 백제군 5백 명이 매복해 있어
곧바로 기습하여 격퇴하였다고 한다.
뒷날 여왕의 신하들이 백제군이 숨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히 여겨 여왕에게 물으니
여왕은 "개구리는 성낸 모양을 하고 있으니 군사를 나타내고,
옥문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성은 음인데, 흰색이다. 흰색은 서쪽을 가리키는 것이니,
서울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군사가 숨은 줄 알았다.
남자는 여자 음문에 들어오면 반드시 죽게 되니 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유학사
여근곡 중심
쉼터
오봉산
정상
주사암
부산성을 축성함에 있어 당시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안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은 성벽 바깥에 있게 부산성이 축성되었다.
그런 예언이 있었으나 신라가 멸망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백년이 더 걸렸다.
또한 이 주사암에는 여태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不死處)라 이르고 있다.
주사암
신라시대에 한 도인이 이 절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궁녀를 훔쳐 새벽에 절에 데려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곤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 임금에게 고하였다.
임금은 궁녀에게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는
무사에게 명하여 표시된 곳을 찾게 하였다.
무사는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궁녀가 표시해 놓은 붉은 모래의 흔적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위 위에는 한 노승이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은 그 소리를 전해 듣고는 그의 미혹한 행동을 벌주려
장수와 군사를 보내 그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노승은 태연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주문을 한 번 외우니
수만의 신중이 산과 계곡에 늘어서 그를 호위하므로 군사들이 놀라 돌아갔다.
그제야 임금은 노승이 이인(異人)임을 깨닫고 궁궐로 맞아들인 다음 국사(國師)로 삼았다.
마당바위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며
그 위는 평탄하여서 백여명이 족히 앉을 수 있다.
마당바위
옛날 신라의 김유신공이 여기에 술 빚는 자리로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한다.
마당바위-지맥석이라고도 하며
말발굽 자국 같은 것이 남아있다.
마당바위 돌탑
성암사
송선리